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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사진

by 푸른달 DD 2024. 8. 19.

사진이 담고 있는 신빙성은 증거와 자명성으로서 특별한 가치를 부여받고 있다. 이런 사진을 '다큐멘터리(docu-mentary)' 라 부를 수 있다.  이것은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어떤 사실ㅇ의 근거나 증거로서 신뢰되는 원래의 공식적 문서--가장 넓은 의미로, 어떤 글이나 책, 또는 정보를 담고 있는 기타 일체의 도구를 포함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어떤 사진이라도 가령 거기에 연구할 만한 특별한 주제에 관한 유용한 정보가 내포되어 있음이 발견 된다면, 하나의 다큐멘트로 간주할 수 있다. 19세기에는 이 용어가 사진적 맥락에서 빈번히 사용되지는 않았다. 1889년 『브리티시 저널 오브 포토그래피』는 광범위한 사진 기록, "가능한 한 가장 완벽한··· 세계의 현 단계에 대한 기록을 저장하는" 보관소의 설립을 촉구했다. 그리고 그렇게 수집된 사진들을 "한 세기 후에는 가장 값진 기록이 될 것" 이라고 결론 내렸다. 이와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앙리 마티스는 1908년 『카메라 워크』지를 통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사진은 실재하는 가장 정확한 기록을 제공할 수 있다. 어느 누구도 그러한 관점에서 비롯하는 그 가치를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만약 그것이 재능있는 사람에 의해 실현된다면 그 사진은 예술의 모습을 갖게 될 것이다. ···아무튼 사진은 기록하고 우리에게 다큐멘트를 남겨 주어야 한다."

  이럴 즈음 미국에서 루이스 하인(Lewis W. Hine)은 뉴욕에 도착하는 이주민에 대한 괄목한 만한 연작사진을 만들고 있었다. 뉴욕·컬럼비아·시카고 등지의 대학에서 사회학자로서의 훈련을 쌓았던 그는 자신의 발견들 타인에게 전달하는 데나 또 탐구하는 데, 가장 강력한 도구로서 카메라를 택했다. 그는 특권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복지를 크게 고려했다. 일차대전 몇 해 동안 하인은 엘리스 섬에 가서 당시 수만 명씩 도착하고 있는 이주민들을 사진에 담았다. 그는 이주민들의 주거지가 될 지저분한 주택까지 따라 들어갔고, 그들의 일터였던 비참한 노동 착취공장에 침투했으며, 쓰레기통 더미에서 놀고 있는 철부지들과 뉴욕 시에 흉칙하게 산재되어 있는 슬럼에 전락한 사람들을 사진에 담았다. 그보다 앞서 리스가 그렇게 했듯이, 하인은 자신의 사진은 주관적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착취당한 계층과 특권 없는 삶들을 짓누르고 있는 경제 체제의 충격에 대해 강력하고 즉각적으로 납득될 만한 비판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사진-해석(photo-interpretations)'이라는 말을 빌려 자신의 사진을 설명했다. 이 사진들은 '인간 기록(human documents)'으로 발행되었다. 대학에서 그가 쌓은 훈련은 그로 하여금 별다른 노력 없이 그 사진 이미지의 사회적 의미와 맥락을 즉각적으로 이해하게 했다. 불필요한 세부에 신경 쓰지 않으면서 그의 동정심은 그가 마주친 개인들에게 집중되었다. 그의 사진들에는 일관하여 이러한 조화가 느껴진다. 그가 5x7인치 카메라로 공장에서 작업 중인 미성년을 촬영했을 때--이것은 사회 각 기관에 보여졌다--보는 이로 하여금 그 노동하는 아이가 참으로 어리구나 하는 것을 충분히 볼 수 있도록 하는 크기의 감각을 제시했다. 이 사진들은 널리 출판되었다. '사진 이야기(photo story)'라는 술어가 그늬 사진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고, 이 술어는 항상 문필가의 이야기에 못지않는 중요성을 갖고 있었으며, 결코 문장을 보조하는 '도해(illustration)'가 아니었다. 아동 착취에 대한 그의 고발은 아동 노동금지법의 역사적 인준을 초래했다.

  하인은 어떤 점으로서도 사진을 부정적 비판에만 국한시키지 않았다. 반면에 그는 어디에서나 긍정적 인간성을 불러일으키고자 했다. 1918년 그는 중부 유럽 여러 나라에서 미국 적십자시의 구제 활동을  촬영했다. 그 몇 년 뒤에는 미국 노동자들에게 관심을 집중시켰고, 이 사진의 한 묶음이 1932년 『일하는 사람들(Men at Work)』로 발행 되었다.

  아마 이 책의 백미는, 세계 최고의 뉴욕 엠파이어 스테이트 백이층 빌딩 건설 현장을 1913년 그 완공시까지 찍은 수백 점에 달하는 사진들 가운데에서 꼽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날이면 날마다 층에서 층으로 철강 노동 현장을 추적했다. 삼발이를 장비한 뷰 카메라를, 때로는 4x5인치 그라플렉스 카메라를 어깨에 걸친 채, 노동자들과 함께 대갈못을 두드려 달구는 용철로 위에 샌드위치를 구어 요기하기도 했고, 아찔한 고층 대들보 위를 걸어다니기도 했다. 그는 노동자들과 함께 빌딩 정상에 올라가, 노동자들로 하여금 크레인으로부터 도시 상공 방향으로 그를 흔들어 밀어내도록 하여, 노동자들이 마천루 맨 꼭대기의 마지막 대갈못을 운반하면서 살아나려고 조심조심 애쓰는 순간을 공중에서 촬영할 수 있었다. 이 장관을 이루는 사진은 멜로드라마도 아니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찍은 것도 아니다. 위험 천만한 작업에 대한 대담하고 솔직한 시선의 기록이다.

  1930년대 세계를 덮친 경제 대공황의 어둠이 들이닥치자 많은 예술가들이 곧 반응을 보였다. 회화에서는 리얼리즘의 복귀를 선언했고, 멕시코 벽화가들의 주도하에서 화가들은 그들의 작업을 통해 대중 교육에 나섰다. 또 일단의 영화작가 그룹은 일상적 오락물과 달리, 그들 스스로 연기자로서 참여하여 현실 상황과 현실 문제에 뿌리를 둔 영화를 제작했다. 이러한 운동의 영국측 대변자 존 그리어슨(John Grierson)은, 그들이 다음과 같은 영화를 생각하고 있었다고 회상한다.

 

  사실을 기록하고 해석하는 가운데 영화는 대중들로 하여금 더욱 많은 체험을 하게 하고, 상상의 신세계에 당당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영향을 끼치는 새로운 수단이 되었다. 그것은 우리가 일상생활로부터 드라마를, 그리고 우리의 문젯거리들로부터 시(詩)를 만들 수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들은 이런 유형의 영화를 다큐멘터리라고 불렀다. 사회적 사진가처럼 그들도 '예술적' 이라는 단어와는 다른 방향으로 눈을 돌렸고, 또 이 운동에서 씌어져 나온 엄청난 양의 글들은, 다큐멘터리 영화는 예술이 아니라고 일관되게 주장한다. "미(美)라는 개념은 다큐멘터리에서는 가장 위험스러운 것"이라고 제작 및 감독자 폴 로사(Paul Rotha)는 『다큐멘터리 영화(Documentary Film)』 속에 쓰고 있다. 그는 더구나 영화에서 사진술--바로 영화의 생명이요, 그 피와 살--은 부차적 중요성을 갖는 것이며, 또 너무 좋은 사진은 해로울 수 도 있다는 놀라운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리어슨은 다음과 같이 썼다.

 

  다큐멘터리는 그 출발에서부터··· 반(反)심미주의적 운동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항상 심미주의자들을 잘 이용할 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복잡하게 된다. 우리는 그들을 좋아했고 또 그들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 우리가 전혀 비심미적인 목표에 요청되는 기법들을 익혔던 것은··· 역설적으로도, 로버트 플래어티(RobertFlaherty)나 알베르트 카발칸티(Alberto Cavalcanti) 같은 사람들의 일차적인 심미주의적 도움과 더불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