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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적 사진

by 푸른달 DD 2024. 1. 14.

1850년대 후반 레일랜더와 로빈슨이 선봉이었던 예술사진은 영국에서 건판 혁명이 일어나자 잠시 주춤거렸다. 로빈슨은, 수많은 구독자들이 해마다 펴내는 그의 사진집을 학수고대할 정도로 여전히 주도적 위치에 있었으나, 대부분 전시 화랑의 벽면에는 전혀 상상력이 빈곤한 아카데믹한  회화의 성격을 띤 일화적이며 풍속적인 장면, 감상적 풍경, 빈약한 초상화 들로 가득  차기가 일쑤였다.

 이런 경진된 포즈의 사진관 사진의 작위적 성격에 반대하는 한편, 여러 장의 음화 조각들을 주워 모은 잡동사니 세공 인화술에 반대하면서 피터 헨리 에머슨은 사진계를 뒤흔든 격렬한 항의를 제기했다. 그는 자신의 사진과 강의·논문 ·책 등을 무기로 삼았다. 1886년 3월 에머슨은 런던의 카메라 클럽에서 '사진술--회화적 예술'이라는 연설을 통해, 존 러스킨이 과학과 예술의 어떤 연관도 거부했다는 이유에서 '발작적으로 고상한 체하는 문학예술가'라고 비난했다. 또 로빈슨의 책을 '문학적 기만과 예술적 시대착오의 한 전형'이라고 공격했다. 에머슨은 청중에게 과학적 원리에 근거한 예술이론을 제시했다. 예술가의 과제는 눈에 들어노는 자연의 효과를 모방하는 것이어야 한다면서, 그리스 조각,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 컨스터블, 코로, 바르비종파의 그림 등이 모든 시대의 예술적 소산의 최고봉들이라고 말했다. 물리학자로서의 훈련을 쌓았던 그는, 헤르만 폰 헬름홀츠(Hermann von helmholtz)가 쓴 『생리학적 광학 개론(Handbook of Physiological Optics)』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에머슨은 이 책을 시지각(視知覺)에 관한 한 가장 권위있는 것으로 인용하곤 했다. 

 에머슨은 사진이 원근법적  해석의 정확성에서 "동판화, 목판화, 목탄 소묘들보다 월등히 낫다"라고 결론지었다. 또 사진이 회화를 능가하지 못하는 이유는 다만 색채의 부재 때문이라 믿었고, 특히 정확한 색조의 상호관계를 재현시킬 능력의 결핍에 있다고 했다.

 같은 해, 에머슨은 한정판 책자 『노퍽 므로즈의 생활 과 풍경(Life and Landscape on the Norfolk Broads)』을 발간했다. 이 책은  한껏 멋을 낸 반절판에 끼운 마흔 점의 백금판 사진 모음집이다. 수록된 사진들은 이스트앵글리아에서 촬영된 것으로, 늪지대 주민들들의 늪과 뭍에 걸친 기묘한 이중생활에 대한 기록이었다. 뒤이어 발행된 책도 농부들의 생활상과 관습을 묘사한 본문을 포함하고 있으면, 음화로부터 직접 제작한 요판 사진들을 담고 있다. 사실상 이 책들은 민속학적 연구들이었고, 사진들이 그 책들의 핵심적인 부분이었다. 각각의 사진들은 현장에서 직접, 대로는 대단히 어려운 조건 속에서 제작된 것들로서 하나같이 꾸밈없고 정직했다. 감상성이나 인위적 조작에서 벗어난 이 사진들은 로빈슨이나 그 추종자들의 예술사진들과 정반대 되는 것이었다.

 스스로 사진가로서 입신한 후 에머슨은 자신의 미학과 기술적 접근을 하나의 교재 속에 설명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예술계 학생을 위한 자연주의 사진술(Naturalistic Photography for Students fo the Art)』(1889)이라는 책인데, 도판은 게재되지 않았다. 대신 학생들에게 『이스트 앵글리아의 생활상(Pictures of East Anglian Life)』(1888)의 사진판들을 참조하도록 권장했다. 영국 전역에 걸친 카메라 클럽들에게, 에머슨은 그 사진들 가운데 한 장이 포함되고 그 사진들에 관한 설명을 수록한  한 페이지를 첫 표지의 안쪽에 풀로 붙인 특별판을 배포했다. '티파티에 투하된 폭탄'이라 회자되었던 '자연주의 사진술(Naturalistic Photoraphy)' 은 진실과 허위의 묘한 복합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ㅇ메머슨은 자기 나름대로 다소 예술사를 곡해하고 있으며, 헬름홀츠식의 시각이론을 또다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적인 면에서 건전한 충고가 꽤 담겨 있으므로 여전히 이롭게 읽힐 수 있을 만한 책이다. 그는 사진이라는 매체를 대단히 존중하고 있었고, 또 사진술의 한계와 동시에 그 가능성에 대해서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에머슨이 추천한 장비는 매우 간단한 것이었다. 뷰카메라 한 대, 6.5X8.5인치의 양호한 온판 크기의 감광판,  튼튼한 삼각대, 상대적으로 긴 초점거리의 렌즈--최소한 감광판 최대변의 두 배짜리--이것들이 전부였다. 그는 휴대용 카메라를 전혀 사용치 않았다. 그는 확대 인화를 비난했으면, 사진의 크기와 그 예술성 사이에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다. "1/4판(3.25X4.25인치) 크기인 한 점의 예술적인 사진이 40X30인치 크기의 상투적 사진 백 장보다 더 값지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학생들은 음화들을 노출한 바로 그날 즉시 현상하라는 충고를 받았다. ㄱ"그렇게 하는 가운데 줄곧 여러분이 추구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정신적 인상을 신선하게 보존할 수 있다"는 것이 에머슨의 주장이다. 그는 또 수정하는 것을 거부한다. "좋건 나쁘건 무시할 만한 것이건, 수정을 거침으로써 사진이 하나의 좋지 않은 소묘나 유화처럼 되는 것이다. ...사진술의 테크닉은 완벽하다. 어떤 어설픈 손질의 도움도 필요 없다"고 하면서, 인화의 두 가지 과정, 즉  플래티노 타입(Platinotype)과 사진요판인쇄술(photogravure, 寫眞凹版印刷術) 또는 사진 동판인쇄술(Photo-etching)의 사용을 권장했다.

 플래티노타입은 철분이 빛에 노출될 때, 제일철의 상태로 전환되는 염화철의 속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염화철이 발생하는 과정에서, 수산화칼륨 속에서 생성될 때의 백금염은 은보다 더 견고한 금속 성분인 금속성 백금으로 환원되며, 이에 따라 이 방식으로 제작된 인화지는 대단한 영구성을 지니게 된다. 이 기술은 1873년 영국에서 윌리엄 윌리스(William Willis)가 고안해냈다. 1880년 윌리스의 플래티노타입 회사가 고도로 민감하게 처리된 인화지를 시장에 내놓자, 이 신종 인화술은 극도의 유행을 타게 되었다. 에머슨에게도 이러한 인화방식의 영구성은 중요했으나, 그 심미적 가치에 보다 주목했다. 거는 그것이 가져온 부드러운 중간 톤을 좋아했다. "낮은 톤의 효과를 위해, 그리고 흐닌 날의 풍경을 위해서라면 플래티노타입은 더 이상 비할 나위 없다"라고 에머슨은 쓰고 있다. 따라서 그는 플래티노타입 회사가 번쩍거리는 인화지를 제조한다는 점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들은 머지 않아 인화지의 사용을 위해서 그토록 좋다는 대담하고, 튀고, 음양의 대비가 뚜렷한 음화들이 요청된다는 그릇된 관념을 조장하는 것을 중지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는 나아가서 이렇게 주장했다. 

 

진정으로 사진술의 미덕과 진보를 마음에  품고 있는 사진가라면, 예술적인 견지에서 여타의 흑백 사진술에 비견되 작품의 제작을 가능하게 한 방식으 고안해낸 윌리스 씨의 덕을 보았다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할 것이다. ...플래티노타입 이전의 방식들처럼 그렇게 미예술적인 인화술이 유행하고 있는 한, 어떤 예술가도 사진술을 별도의 한 예술로서 만족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사진동판인쇄술과 플래티노타입이 예술로서 승리를 거두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로서는 결코 다른 방식으로 사진을 만들지 않을 것이다.